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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문학 톺아보기 |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루월의『영화배우술』을 톺아보다
    카테고리 없음 2020. 7. 9.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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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배우술』은 어떻게 출판되었나?​박루월은 1935년 무렵부터 대체로 시, 영화소설, 시나리오를 발표 할 때면 朴淚月로, 『영화시대』의 편집후기나 저서에서는 朴嶁越로 필명을 나누어 썼다. 잡지 ‘편집자’로서의 자아와 문학 작품의 ‘작가’로서의 자아를 구분하기 위해서였을까? 우선, 작가 朴淚月은 그 때도 지금도 주류는 아니었다. 선행 연구가 정의했듯 그의 문학세계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로 요약 가능하다.4) 그는 『젊은이의 노래』1930, 『회심곡』1930, 『세 동무』1930 등 10여 편의 영화소설을 남겼으나 대부분이 원작 소설이나 영화를 신파성을 가미해 베껴 쓴 것으로 독창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박루월의 작업을 각색이나 번안의 차원에서 검토한다면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가 처해 있던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소설의 재매개가 갖는 문화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朴嶁越은 어땠을까? 박루월의 변변찮은 필력과 통속적 지향 때문에 『영화시대』는 식자층으로부터 저급 잡지로 매도당했지만 최근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면서 그는 ‘토착적이고 마이너한 영화 문화의 매개자’로 평가되고 있다. 5)​朴嶁越이라는 필명으로 출판한 『영화배우술』 역시 연기론에 대한 진지한 이론서라기보다는 편집자, 매개자로서 박루월의 특성(?)이 발휘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배우술』은 『영화시대』나 신문지상에 이미 발표되었던 글과 구술로 구성되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표절이며 좋게 보면 ‘개정판’이다. 이 책은 서문-본문-조선영화발달사-조선영화인약전-후기-부록(영화소사전)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는 이 책을 감수한 안석영을 비롯하여 여러 지인들의 추천사가 실렸다. 안석영에 따르면 박루월은 “조선에서 맨 처음 영화잡지를 맨드러내었고 그늘에서 조선영화에 조력을 한 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 한 권은 그의 삶의 빛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6) 그러니까 『영화시대』가 기약 없는 휴간에 들어간 직후에 출판된 이 책은 박루월에게는 편집자로서의 활동을 정산하는 작업인 동시에 꽉 막힌 현실에 대한 타개책이었던 셈이다. 미술가이자 작가, 영화감독이었던 안석영, 소설가이자 평론가 홍효민, 감독 이규환, 서광제, 김유영, 안종화, 시나리오 작가 이익의 추천사, 「조선영화인약전」에 일일이 응답해준 영화인들의 성의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이 책을 엮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9년 동안 『영화시대』의 편집주간으로 쌓은 인맥이었다. 그가 사망하기 한 해 전에 출판한 『인기스타아 서한문』을 보더라도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 신영균, 최무룡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기꺼이 팬레터와 그에 대한 답장을 공개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편집자로서 그의 능력은 문장력보다는 인맥에 있었던 듯하다.​4) 김영애, 「박루월 소설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61집,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3, 192쪽.5) 이화진, 「영화를 읽는 시대의 도래, 『영화시대』1931-1949」, 『한국극예술연구』 63집, 한국극예술학회, 2019, 23쪽 참조.6) 박루월, 『영화배우술』, 삼중당서점, 1939, 2쪽. 앞으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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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배우술』의 내용은 어떠한가?​32절로 구성된 본문은 『영화시대』에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연재된 임하林霞의 「영화배우독본」을 저본으로 한다. 박루월이 류벽촌柳碧村이라는 필명으로 『영화시대』에 「영화감독론」(1935년4월호, 7월호)을 연재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임하는 그의 또 다른 필명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배우독본」의 연재가 『영화시대』의 불안정한 경영 때문에 여러 번 중단되었고 결국 끝맺지 못했기에 다시 펴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데 ‘영화를 연구하고 영화예술에 일생을 바칠 참된 영화인이 되고자 하나 방방곡곡에 숨어서 혼자 애태우고 있는’(25쪽) 배우지망생들을 위해 썼다지만 『영화배우술』은 교과서적인 체제와 그 방면의 최신 정보를 갖추었던 저작은 아니다. 그렇지만 연기론 외에도 촬영, 스튜디오, 로케이션, 엑스트라, 의상, 분장, 영화소사전(부록) 등 연기 외에도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정리되어 있어 입문서 내지는 독학자용 서적으로 수요가 있었을 법하다. 연기론으로서 이 책의 문제점은 박루월의 제한적인 현장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일본에서 단역배우로 활동했던 시기와 단성사나 영화시대사에서 제작자로 활동했던 시기는 길게 보아 무성영화의 전성기에서 토키로의 이행기까지 약 10년간이었다. 영화배우 양성을 위한 전문기관이 없었고 영화적 연기를 위한 별도의 훈련도 기대할 수 없었던 조선영화계에서 배우의 원천을 제공했던 곳은 무대예술계였다. 많은 배우들이 신파극에서 무성영화로넘어왔고 그 역시 토월회 계통의 배우로서 연기 경험을 살려 무성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발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그가 익혔던 연기술은 구태의연한 것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무성영화의 연기는 몸짓과 표정으로 언어의 결핍을 보충하는 것이어서 무대 연기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발성영화는 배우들에게 심리와 감정 표현을 대사와 목소리의 톤으로 대신하고 무성영화적 과잉을 완화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요구했다.​『영화배우술』은 이러한 박루월의 경험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배우 되는 사람은 무성영화와 토키의 구별을 해서 자기의 연기를 발휘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145쪽)고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연기란 여전히 동작과 몸짓의 문제이지 목소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액션(22절 ‘동작과 몸 갖이는 법’)과 표정(17절 ‘감정표현술’ 및 20절 ‘그의 표정술’)의 단련을 위한 절은 있어도 목소리와 대사에 대해 다룬 절은 없고 당시 영화감독들의 고민이었던 배우의 목소리, 톤, 조선어 발음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본문의 뒤를 잇는 「조선영화발달사」는 1900년대 초에 수입된 활동사진에서부터 1939년 9월까지 조선영화의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기술한 글이다. 이 글의 저본은 연쇄극 배우에서 출발하여 영화배우, 감독을 거친 안종화가 『조선일보』(1938년 11월 20일~30일)에 연재했던 「영화제 전기(前期) 20년 고투의 형극로: 조선영화발달의 소고」이다. 조선일보사는 1938년 11월 20일에 조선 최초의 영화제를 개최했는데 안종화의 글은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한 기획기사였다. 9절로 구성된 「조선영화발달사」 중 무성영화 시대를 다룬 6절까지가 안종화의 글이고 나머지가 박루월의 글이다.그러나 박루월은 “선배 안종화 씨의 도움이 크다”(255쪽)는 말 한마디로 저작권 표시를 대신했다. 박루월이 쓴 부분은 발성영화로의 이행기부터 『영화배우술』이 출판되기 직전인 1939년도 9월 18일 현재까지를 다루었다. 대체로 그 자신과 친분이 깊던 영화인들의 활동에 대한 소개가 자세한데 다음과 같이 영화시대사가 제작한 무성영화 <춘풍>에 대한 깨알 같은 PR도 잊지 않았다. “(양세웅 촬영감독과 박기채 감독을) 마저 오는 알선과 자력資力을 제공한 유일한 공로자 두 분이 있으니 7, 8년 동안 영화시대(월간지)와 더불어 분투奮鬪하여왔든 박루월, 김현수金賢秀 씨가 있었든 터이다.”​마지막으로 「조선영화인약전」은 프로듀서(제작자) 편, 감독 편, 남녀배우 편, 각본작가 편, 촬영기사 편으로 나누어 영화인들의 본명, 나이, 출생지, 학력, 취미, 영화계 입문 계기, 필모그래피, 항간의 평가 등을 정리한 일종의 색인이다. 조사를 위해 박루월은 해당 영화인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에 대한 박루월의 평가는 후하다 못해 부담스럽다. 예를 들어 당시 신인 여배우였던 김신재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꽃과 같이 향기롭고 달과 같이 아름답게 생긴 우리의 한 떨기 명화名花다. 그리고 섬세하고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여성이다. 처음으로 나온 씨이지만 씨와 같이 능란한 재조才操를 가진 여우女優는 없으리라고 필자는 자랑한다.”(262-263쪽) 그렇지만 『영화배우술』은 바로 이 약전 때문에 요즘 말로 ‘덕질 필템팬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물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사보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와 같은 애정 과잉을 ‘팬심’으로 공유하는 조선영화 팬들이었기에. 박루월은 해방 후 속간된 『영화시대』 (1946년 4월호~10월호)에 「조선영화인약전」을 다시 연재했는데 이와 같은 ‘재활용’은 해방 이후 조선영화의 팬덤이 부활하여 얼마간 지속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영화배우술』 이후 박루월은 왜 활동을 중단했을까? 시국과 비교적 무관했던 『영화시대』조차 이미 1938년 1월호에 황국신민서사를 게재했고 1939년 8월호를 끝으로 다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서광제가 친일영화 <군용열차>1938를 감독한 것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조선영화인들은 전쟁 협력의 길을 걸었다. 1940년에 한글 잡지와 신문이 폐간되었고, 조선영화령으로 모든 영화사가 국책회사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폐합되었으며, 조선영화는 일본영화의 한 부분으로서, 전쟁 프로파간다의 전파를 위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다. 20세기의 어떤 식민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예외, 영세한 자본과 제국의 통제 속에서도 토착적으로 생성·발전한 영화계와 그 애호자들을 매개했던 박루월의 설 자리 또한 더 이상 없었다.​


    김려실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산대 예술문화와영상매체협동과정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일본영화와 내셔널리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 1901-1945년 한국영화사를 되집다』, 『만주영화협회와 조선영화』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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